8화 · 그림자의 추적
이튿날 오후, 훈은 다시 운종가로 나섰다.
나흘째였다.
서책방 '문우사'로 향하는 훈의 발걸음은 더 이상 설렘으로 들떠 있지 않았다. 습관처럼 굳어진 무거움만이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서책방 문턱을 넘어서자 익숙한 묵향이 그를 맞았다.
주인은 이제 훈이 들어와도 놀라지 않았다. 그저 안쓰러운 눈빛으로 가볍게 목례를 할 뿐이었다.
훈은 서가 안쪽으로 걸어갔다.
<북학의>가 꽂힌 자리. 그곳은 이제 훈에게 기대와 실망이 매일같이 반복되는 늪이었다.
책을 꺼내 펼쳤다.
여전히 비어 있었다.
며칠 전 자신이 남긴 쪽지만이 누렇게 바랜 채, 주인을 잃은 편지처럼 꽂혀 있었다.
'역시... 오지 않는구나.'
훈은 책을 덮었다.
실망감조차 무뎌질 만큼 반복된 일이었다.
그는 기둥 뒤편, 늘 앉던 자리에 앉지 않았다. 대신 책을 제자리에 꽂아두고, 손으로 책등을 한 번 쓸어내렸다.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그녀는 오지 않는다. 사정이 있든, 마음이 변했든, 결과는 같았다.
이곳은 더 이상 두 사람의 대화 장소가 아니라, 훈 혼자만의 미련이 고인 웅덩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으리."
태석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훈은 고개를 돌려 태석을 보았다. 그의 눈빛에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왕의 변덕에 호위무사까지 고생시키고 있는 꼴이었다.
"가자."
훈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기다림은 끝났다. 아니, 끝내야 했다.
중전의 말이 옳았다. 왕이 이름 모를 여인의 부재에 흔들려 국사를 그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훈은 서책방을 둘러보았다.
먼지가 부유하는 햇살, 낡은 책장 냄새, 그리고 그녀가 앉아있던 좁은 평상.
그 모든 풍경을 눈에 담았다. 이것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동안 신세 졌소."
훈은 서책방 주인에게 엽전 꾸러미를 건넸다. 책값이라기에는 과한 금액이었다. 주인은 당황하여 손사래를 쳤으나, 훈은 꾸러미를 계산대에 내려놓고 돌아섰다.
서책방을 나서는 훈의 발걸음은 며칠 전보다 빨랐다.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애쓰는 걸음이었다.
운종가의 거리는 여전히 활기찼다.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물건을 사고팔았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화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오직 훈의 마음속에서만 폭풍이 지나간 뒤의 폐허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래. 한때의 꿈이었다.'
훈은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답답한 궁궐 생활 속에서 잠시 꾸었던 달콤한 꿈. 깨어나면 사라질 신기루 같은 인연.
그녀가 남긴 글귀들은 훌륭했으나, 그것이 훈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는 없었다. 그는 조선의 왕이었고, 그녀는 저잣거리의 여인이었으니까.
훈은 옷깃을 여미며 걸음을 재촉했다.
궐의 높은 담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견고한 벽이 오늘따라 훈을 위로하는 듯, 혹은 비웃는 듯 묵묵히 서 있었다.
그는 다시 저 담장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성군이라는 가면을 쓰고, 고독이라는 옥좌에 앉아야 했다.
그것이 이훈이라는 사내의 운명이었다.
돈화문 쪽문이 열리고 훈이 안으로 사라졌다.
문이 닫히는 둔탁한 소리가 훈의 가슴 속에서 메아리쳤다.
***
한편, 북촌 좌의정 댁.
혜인은 처소에 갇혀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바늘이 천을 뚫고 지나갈 때마다 혜인의 속도 타들어 갔다. 닷새째였다.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박 행수의 감시는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마님, 좀 쉬세요. 손끝이 다 텄습니다."
연이가 안쓰러운 듯 바늘을 뺏으려 했다. 혜인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서 그래."
혜인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늘은 맑았으나, 혜인의 눈에는 철창에 갇힌 새장처럼 답답하게만 보였다.
김 선비는 기다렸을까.
아니면 며칠 오지 않는 자신을 탓하며 돌아섰을까.
확인할 길이 없다는 것이 혜인을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때, 행랑채 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빨리 채비해라!"
박 행수의 고함이었다.
잠시 후, 대문이 열리고 가마꾼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
혜인이 방문을 열고 물었다. 연이가 마당을 내다보고는 급히 뛰어왔다.
"마님! 영감마님께서 급히 입궐하신답니다. 청나라 사신단이 예정보다 일찍 당도했다는 전갈이 왔대요."
"사신단이라니... 서방님께서 오시는 것이냐?"
"예. 의주를 지났다던 행렬이 벌써 도성 근처라니, 영감마님께서 맞이하러 가셔야 한다고 난리십니다."
혜인은 놀랐으나, 동시에 본능적인 기회가 왔음을 직감했다.
사신단을 맞이하러 나간다면 적어도 반나절은 걸릴 것이다. 게다가 지금 당장은 집안 하인들의 정신이 온통 사랑채 쪽에 쏠려 있었다.
"연이야."
혜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장옷을 가져오너라."
"예? 마님, 안 돼요! 박 행수가 알면..."
"박 행수도 영감마님을 따라갈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 잠깐이면 된다. 아주 잠깐이면."
혜인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연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심한 듯 장롱에서 장옷을 꺼내왔다.
"빨리 다녀오셔야 해요. 제가 망을 보고 있을게요."
"고맙다."
혜인은 장옷을 뒤집어쓰고 뒷문 쪽으로 달렸다.
다행히 뒷문을 지키던 하인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혜인은 빗장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거리를 달리는 혜인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닷새 만에 마시는 바깥공기였으나, 그것을 음미할 여유조차 없었다.
운종가에 도착했을 때, 해는 이미 서산에 걸려 있었다.
서책방 '문우사'는 문을 닫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주인장!"
혜인이 다급하게 안으로 들어서자, 책을 정리하던 주인이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아이고, 부인 아니십니까. 며칠 통 안 보이셔서 걱정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
혜인은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서가 안쪽으로 향했다.
<북학의>가 꽂힌 자리.
혜인의 손이 떨렸다. 책이 없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다행히 책은 그 자리에 있었다.
혜인은 책을 꺼내 펼쳤다.
책갈피 사이에 두 장의 쪽지가 끼워져 있었다.
하나는 며칠 전에 꽂힌 듯 종이 귀퉁이가 살짝 말려 있었고, 다른 하나는 잉크가 덜 마른 듯 선명했다.
혜인은 먼저 빛바랜 쪽지를 집어 들었다. 그녀가 오지 않기 시작한 날 남긴 질문인 듯했다.
[상업을 일으키면 백성은 배부르나 사대부의 기강이 무너진다고들 하오. 이익을 좇는 마음을 어찌 다스려야 하겠소?]
그리고 그 위, 오늘 남겨진 듯한 새하얀 쪽지가 겹쳐져 있었다. 내용은 짧았으나, 글씨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며칠째 답이 없어 염려되오. 궂은 날씨 탓이길 바라오. 나는 오늘도 기다리겠소.]
혜인은 두 쪽지를 번갈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기다렸다. 혜인이 오지 않은 닷새 동안, 그는 질문을 남겨두고, 다시 걱정을 남겨두며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가슴 한구석이 찌릿했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 그리고 그럼에도 자신을 기다려준 이에 대한 고마움.
혜인은 품속에서 며칠 전 써두었던 답장을 꺼냈다.
구겨지지 않게 소중히 간직해 온 종이였다.
[답이 늦어 송구합니다. 집안에 사정이 있어 며칠 발걸음을 하지 못했습니다. 김 선비께서 부디 노여워 마시고 이 미련한 답을 기다려 주셨기를 바랍니다.
이익을 좇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물길을 막으면 터지듯, 본성을 억누르면 탈이 납니다. 기강은 억누름이 아니라, 백성이 넉넉해진 뒤에 비로소 바로 서는 법입니다.]
혜인은 자신의 답장을 훈의 쪽지 아래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책을 다시 꽂아두었다.
"부인, 이제 문을 닫아야 합니다만."
주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혜인은 서책방을 나섰다.
돌아가는 발걸음은 올 때보다 무거웠으나, 마음만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답을 전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거리는 이미 어둠에 잠겨 있었다. 상점들은 하나둘 문을 닫았고, 늦은 귀가를 서두르는 행인들의 발걸음만 분주했다.
혜인은 장옷을 깊게 눌러쓰고 걸음을 재촉했다.
북촌으로 향하는 길은 멀고 험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으나 멈출 수 없었다.
'제발, 조금만 더.'
혜인은 이를 악물고 달렸다.
저 멀리 솟을대문이 보였다. 집 앞에는 횃불이 켜져 있었으나, 다행히 대문은 아직 닫히지 않은 상태였다. 하인들이 주인의 귀가를 기다리며 분주하게 오가는 틈을 타야 했다.
혜인은 집 뒤편으로 돌아갔다. 개구멍이나 다름없는 작은 쪽문이 있었다.
그녀는 주위를 살핀 뒤, 문을 살짝 밀었다.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마님!"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혜인의 팔을 잡아챘다. 혜인은 비명을 지를 뻔했으나, 익숙한 목소리에 입을 막았다. 연이였다.
"연이야."
"세상에, 어찌 이제 오십니까! 영감마님께서 곧 당도하신다는 전갈이 왔단 말입니다!"
연이는 울상이었다. 혜인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간발의 차였다.
"아직 안 들어오신 게냐?"
"예. 저기 큰길 어귀까지 행차가 들어왔다 합니다. 어서, 어서 들어가세요!"
연이는 혜인의 등을 떠밀었다. 두 사람은 고양이처럼 발소리를 죽여 안채로 숨어들었다.
혜인이 방 안으로 들어와 장옷을 벗어 던지고, 바느질거리를 잡는 순간이었다.
"대감마님 드십니다!"
대문 밖에서 문지기의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혜인은 거칠게 몰아쉬던 숨을 억지로 삼켰다.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소매로 훔쳐냈다.
쿵, 쿵.
시아버지의 발소리가 마루를 울렸다. 그 소리가 점점 혜인의 처소 쪽으로 다가왔다.
혜인은 바늘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안에 있느냐."
민암의 목소리였다. 낮고 건조한, 감정 없는 목소리.
"예, 아버님."
혜인은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별일 없었느냐."
"예. 방 안에만 있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짧은 침묵이 혜인에게는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문밖에서 민암의 시선이 문풍지를 뚫고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역관 놈들이 날짜를 잘못 알았어. 아직 개성에도 못 왔다는구나."
민암이 툭 내뱉었다. 허탕을 친 짜증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헌데 너는 지아비가 오는지 안 오는지 궁금하지도 않더냐? 며느리가 되어서는 남편 소식에 귀를 닫고 있으니 쯧."
민암의 힐난에 혜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송구합니다, 아버님."
"기준이 놈도 곧 온다 하니, 헛바람 들지 말고 집안 단속이나 잘하고 있거라."
발소리가 멀어졌다. 사랑채 쪽으로 향하는 듯했다.
그제야 혜인은 참고 있던 숨을 터뜨렸다.
"하아..."
손에서 바늘이 툭 떨어졌다. 온몸에 힘이 빠져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살았다. 들키지 않았다.
"마님, 괜찮으세요?"
연이가 물 한 그릇을 떠 왔다. 혜인은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자, 뜨겁게 달아올랐던 심장이 조금 진정되었다.
"그래. 괜찮다."
혜인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위험한 도박이었다. 목숨을 건 외출이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가슴 한구석에서 묘한 희열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품속에 손을 넣었다.
김 선비가 남긴 쪽지는 서책방에 두고 왔으나, 그 글귀는 마음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궂은 날씨 탓이길 바라오. 나는 오늘도 기다리겠소.]
그 한 줄의 문장이 혜인을 지탱하고 있었다.
이 차가운 감옥 같은 집에서도, 그녀를 기다려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
그것이 혜인에게는 유일한 구원이었다.
혜인은 창문을 살짝 열었다.
밤하늘에 반달이 떠 있었다. 저 달은 운종가의 서책방도 비추고 있을 것이다.
내일이면 그가 서책방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책 속에 끼워진 자신의 답장을 발견할 것이다.
그의 표정이 어떨지 상상해 보았다. 안도할까, 아니면 늦은 답장에 타박할까. 아니, 그는 분명 기뻐할 것이다.
혜인은 미소 지었다.
내일 다시 이곳에 갇히더라도, 오늘 전한 그 마음만은 자유롭게 날아가 그에게 닿기를.
***
같은 시각, 운종가 서책방 '문우사'.
주인 노인은 가게 문을 닫으려다 말고 멈칫했다.
구석진 서가, <북학의>가 꽂힌 자리가 눈에 밟혔기 때문이었다.
"허허, 기어이 다녀가셨구먼."
노인은 책을 꺼내 펼쳐보았다.
책갈피 사이에 쪽지가 두툼해져 있었다. 며칠간 애타게 기다리던 그 선비의 쪽지 아래, 부인의 답장이 얌전하게 끼워져 있었다.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책을 제자리에 꽂았다.
장사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니지만, 책으로 연애를 하는 양반들은 처음 보았다. 얼굴도 모르면서 글만 주고받는 것이 답답할 법도 하건만, 두 사람의 정성은 지극했다.
"내일 그 선비님이 오시면 펄쩍 뛰시겠어."
노인은 혀를 차면서도 기분 좋은 듯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는 촛불을 끄고 가게 문을 닫았다.
달그락.
자물쇠가 채워졌다.
어둠 속에 잠긴 서책방 안, 수만 권의 책들 사이에서 오직 한 권의 책만이 두 사람의 체온을 품은 채 내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밤바람이 문풍지를 흔들었다.
하지만 책 속에 담긴 진심은 흔들리지 않고, 고요하게 아침을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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