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 닫힌 문, 닫힌 마음
좌의정 댁의 아침은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안채 마당에 꿇어앉은 하인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사랑채 문이 열리고 민암이 모습을 드러냈다.
"박 행수."
낮게 깔린 목소리에 집사 박 행수가 엎드려 조아렸다.
"예, 대감마님."
"오늘부터 대문을 걸어 잠가라. 내 허락 없이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드나들지 못한다."
"명심하겠습니다. 하오나 갑자기 무슨 연유로..."
"곧 기준이가 돌아온다."
민암이 짧게 답했다. 박 행수는 그 말의 무게를 알아듣고 고개를 숙였다.
민암의 아들, 민기준이 청나라 사행길을 마치고 귀국한다는 전갈이 왔다. 집안의 대소사를 관장하던 실세가 돌아오는 만큼, 흐트러진 기강을 바로잡고 맞을 채비를 하라는 뜻이었다.
"특히..."
민암의 시선이 안채, 며느리 혜인의 처소 쪽을 향했다.
"며느리 아이 단속 철저히 해라. 요즘 들어 밖으로 나도는 낌새가 보이더구나."
민암은 혀를 찼다.
며칠 전, 혜인이 장옷을 쓰고 대문을 나서는 것을 얼핏 보았다. 얌전한 줄 알았더니 서방 없는 틈을 타 바깥바람을 쐬고 다니는 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문의 체면을 중시하는 그에게 며느리의 잦은 외출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서방이 오는데 정숙하게 안방을 지키고 있어야지, 어디를 싸돌아다니는 게냐. 행여라도 밖으로 나갈 생각일랑 말라고 일러라."
"알겠습니다."
민암은 뒷짐을 지고 사랑채로 들어갔다.
그의 명령과 함께 육중한 대문이 닫히고, 빗장이 걸렸다. 쿵, 하는 소리가 안채 깊숙한 곳까지 울려 퍼졌다.
혜인은 방 안에 갇힌 채 그 소리를 들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마님, 정말 큰일 났어요."
연이가 울상으로 들어왔다.
"영감마님께서 서방님 오실 때까지 대문 출입을 금하셨답니다. 쪽문까지도요."
"......알고 있다."
혜인은 떨리는 손으로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남편이 돌아온다는 소식보다, 당장 오늘 서책방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이 더 큰 절망으로 다가왔다.
오늘은 가야 했다.
어제 훈이 남긴 질문, '상업을 진흥시킬 방도'에 대한 답을 밤새 고민하여 적어두었다.
[장사를 천하게 여기는 것은 낡은 생각입니다. 상인이 이득을 취해야 물자가 돌고, 물자가 돌아야 나라가 부강해집니다.]
이 글을 전해야 하는데.
그에게 닿지 못할 종이 조각이 야속하기만 했다.
오늘도 가지 않는다면,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변덕스러운 여인의 장난이었다고 여길까. 아니면 자신에게 무슨 변고라도 생겼다 걱정할까.
혜인은 쪽지를 꺼내 들었다. 전해질 수 없는 글이었다.
서책방 문우사. 그 좁고 낡은 공간에서 나누었던 대화들이 신기루처럼 멀어지고 있었다. 담장은 너무 높았고, 빗장은 단단했다.
혜인은 쪽지를 촛불에 태웠다. 타들어 가는 종이와 함께, 짧았던 일탈의 꿈도 재가 되어 흩어졌다. 하지만 가슴 속에 남은 불씨는 꺼지지 않고 혜인의 속을 태웠다.
***
사흘이 지났다.
훈은 하루도 빠짐없이 운종가로 나갔다.
김 상선이 "전하, 이러다 소문이라도 나면 큰일입니다"라고 읍소했으나, 훈은 듣지 않았다.
서책방 문우사의 기둥 뒤.
그곳은 이제 훈의 지정석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해가 질 때까지 책 한 권을 펴놓고 입구만 바라보았다.
손님이 들어올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았다가, 옥색 치마가 아님을 확인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수십 번.
기다림은 희망에서 초조함으로, 초조함에서 걱정으로, 그리고 마침내 깊은 상실감으로 변해갔다.
"나으리, 오늘도 안 오시는 것 같습니다."
태석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서가에 꽂힌 <북학의>를 꺼냈다. 책갈피 사이에는 며칠 전 자신이 남긴 쪽지가 누렇게 바랜 채 그대로 꽂혀 있었다.
아무도 읽지 않은 글. 닿지 못한 목소리.
훈은 쪽지를 빼냈다. 구겨질까 조심스레 품에 넣었다.
"가자."
훈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서책방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이 전보다 작아 보였다. 운종가의 활기찬 소음도, 백성들의 웃음소리도 더 이상 훈에게 위로가 되지 못했다. 세상의 색채가 빠져나간 듯, 궐로 돌아가는 길도 무채색이었다.
대전의 밤은 적막했다.
훈은 서안 앞에 앉아 있었으나, 붓을 들지는 않았다. 읽을 책도, 쓸 글도 없었다.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았다.
"전하."
중전 조씨가 들어왔다. 그녀는 익숙하게 다과상을 내려놓고 훈의 맞은편에 앉았다. 훈은 시선을 창밖 허공에 둔 채 반응하지 않았다.
조씨는 그런 훈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훈은 달랐다. 밤늦도록 서책을 붙들고 아이처럼 웃었고, 경연에서는 좌의정을 압도할 만큼 기세가 등등했다. 마치 메마른 땅에 단비가 내린 듯 생기가 넘쳤었다.
헌데 오늘은 다시 시들어버린 화초 같았다. 아니, 전보다 더 깊은 심연 속에 잠겨 있는 듯했다.
"안색이... 며칠 전과는 딴판이십니다."
조씨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때는 책 읽는 즐거움에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하시더니, 오늘은 어찌하여 책을 덮어두고 계십니까? 궐 밖 출입도 잦으시다 들었는데, 혹 무슨 변고라도..."
"중전."
훈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물기를 머금은 듯 잠겨 있었다.
"사람이...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는가?"
"예?"
"어제까지만 해도 곁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이, 연기처럼 사라질 수도 있느냐는 말이오."
조씨는 찻잔을 따르던 손을 멈췄다. 그녀의 시선이 훈의 얼굴에 머물렀다. 초췌한 안색, 텅 빈 눈동자. 그것은 단순한 피로가 아니었다.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벗이오."
훈은 씁쓸하게 웃었다.
"내 평생 처음으로 마음을 터놓았던 벗 말이오. 얼굴도, 이름도, 어디 사는지도 모르지만... 내 말을 들어주던 유일한 사람이었소."
"궐 밖에서 만나셨던 그분 말입니까?"
"그렇소. 헌데... 오지 않는구려. 며칠을 기다려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소."
훈은 품에서 꼬깃꼬깃해진 쪽지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마치 내가 꾼 꿈이었던 것만 같소. 서책방에서의 대화도, 그 사람이 남긴 글귀도... 다 내 환상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허망하오."
훈의 고백은 담담했으나, 그 안에 담긴 상실감은 깊었다.
마치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사람처럼, 그는 공허해 보였다.
조씨는 훈을 빤히 응시했다.
왕에게 벗이라니. 그것도 궐 밖에서 만난 정체불명의 사람.
사내인가, 여인인가. 조씨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훈이 저토록 애달파하는 대상이 평범한 사내일 리 없다는 것을. 사내들끼리의 우정이라면 술 한잔 기울이고 털어버리면 그만일 테니까.
"전하."
조씨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 벗이라는 분... 혹 여인이십니까?"
훈의 손이 멈칫했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여인이오."
"......"
"허나, 중전이 생각하는 그런 사이는 아니오. 우리는 그저 책을 읽고, 조선의 앞날을 걱정하며 글을 나누었을 뿐이오. 여인이기 이전에, 나보다 더 깊은 식견을 가진... 그래, 사상적 동지였소."
훈은 급히 덧붙였다. 자신의 감정이 세속적인 연정으로 오해받는 것이 싫었다. 그와의 관계는 그보다 더 담백하고 지적인 것이라 믿었다.
조씨는 쓴 차를 삼켰다.
동지. 사상적 교류.
훈은 그렇게 정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씨의 눈에는 다르게 보였다.
고작 며칠 서신을 주고받은 여인이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식음을 전폐하고, 나라 잃은 표정을 짓는 왕이라니.
"동지라 하셨습니까."
조씨가 차분하게 되물었다.
"전하께서는 그분을 귀한 인재로 여기시는 듯하나, 그분 입장에서는 그저 스쳐 가는 인연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서책방에서 우연히 만나 글 몇 줄 나눈 것이 전부 아닙니까."
"스쳐 가는 인연이라..."
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말이 아프게 박혔다.
"그럴지도 모르오. 허나 내게는... 그 짧은 글귀들이 조정 대신들의 백 마디 말보다 더 깊게 와닿았소.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단 말이오. 헌데 그 대화가 끊어지니, 다시금 사방이 꽉 막힌 기분이 드는구려."
훈은 가슴을 쳤다.
조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왕은 외로운 사람이었다. 천하를 다 가졌으나 정작 속마음을 털어놓을 곳 하나 없는 사람. 그 빈틈을 낯선 여인이 파고든 것이다. 하지만 왕이 그 여인에게 의존하는 것은 위험했다.
"전하."
"말하시오."
"그 만남이 전하께 위로가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허나 그것이 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전하께서는 이 나라의 지존이십니다. 이름 모를 이의 부재에 흔들리셔서는 아니 됩니다."
조씨의 조언은 따끔했다. 훈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단호했다.
"기다리십시오. 인연이 닿는다면 다시 오시겠지요. 허나 오지 않는다 하여 전하께서 이리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신다면, 그 또한 그분께는 부담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씨는 잠시 말을 골랐다.
"전하를 바라보는 조정의 눈이 많습니다. 중심을 잡으셔야 합니다."
"......알겠소. 중전의 말이 옳소."
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씨의 이성적인 말이 찬물처럼 정신을 깨웠다.
"수라를 들이라 하겠습니다. 기운을 차리셔야 국사도 돌보실 것 아닙니까."
조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훈은 다시금 서책을 펼쳤다. 이번에는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중전의 말대로, 왕이 흔들려서는 안 될 일이었다.
조씨는 대전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밤바람이 불어왔다.
'동지라...'
조씨는 훈이 있던 쪽을 뒤돌아보았다.
왕이 누군가에게 저토록 마음을 여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그 대상이 누구인지 궁금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왕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이 우선이었다.
'부디... 한때의 바람으로 지나가기를.'
조씨는 옷깃을 여미며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뒷모습은 언제나처럼 단정하고 흐트러짐이 없었으나, 그림자는 길게 늘어졌다.
그때, 회랑 끝에서 상궁 하나가 조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최측근인 박 상궁이었다.
"마마, 분부하신 다과상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되었다. 그보다 박 상궁."
조씨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나직이 불렀다.
"예, 마마."
"전하께서 최근 궐 밖으로 잠행을 나가시어 들르신 곳이 어디인지 알아보거라."
박 상궁이 의아한 듯 조씨를 쳐다보았다. 평소 왕의 사생활을 존중하던 중전답지 않은 지시였다.
"전하의 동선을 파악하라는 말씀이시옵니까?"
"동선뿐만이 아니다. 그곳에서 누구를 만나셨는지, 어떤 연유로 그토록 마음을 쓰시는지 낱낱이 알아와야겠다."
조씨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단순한 질투가 아니었다. 왕을 흔들고, 국정마저 소홀히 하게 만드는 존재라면 그것이 누구든 경계해야 했다. 만약 왕에게 해가 되는 자라면, 자신이 먼저 나서서라도 끊어내야 했다.
"은밀히 움직여라. 전하께는 절대 비밀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마마."
박 상궁이 고개를 숙이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조씨는 텅 빈 회랑에 홀로 남았다.
'전하를 위해서입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에서 피어오르는 불안감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왕이 숨겨둔 그 '벗'의 정체가 무엇이든, 그것이 결코 가벼운 인연이 아닐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조씨의 발목을 잡았다.
조회수 2·좋아요 0·1/14/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