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 웃으시니 되었습니다
근정전의 밤은 깊고 고요했다. 자시(밤 12시)를 알리는 북소리가 멀리서 들려왔으나, 대전 안의 불빛은 여전히 꺼질 줄 몰랐다.
중전 조씨는 회랑 기둥 뒤에 서서 그 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인들이 탕약을 들고 대기하고 있었으나, 그녀는 손짓으로 물렸다. 직접 들고 가겠다는 뜻이었다.
"전하, 밤이 늦었습니다. 이제 그만 침수로 드시지요."
상선 김 내관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잠시만. 이것만 마저 읽고."
훈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지치고 가라앉은, 의무감에 젖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무언가에 깊이 몰입한, 생기가 감도는 목소리였다.
조씨는 발을 떼려다 멈췄다. 창호지 문에 비친 그림자 때문이었다.
훈은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고 허공을 응시하더니, 붓을 들어 무언가를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붓끝이 춤을 추듯 경쾌했다.
그리고 웃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없이, 그러나 환하게 웃었다.
조씨는 그 낯선 그림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훈의 곁을 지킨 지 칠 년. 그동안 훈은 늘 진지했고, 늘 무거웠다. 왕이 된 후에는 그 무게가 더해져, 웃음이라곤 쓴웃음이나 허탈한 웃음이 전부였다.
그런데 지금, 훈은 웃고 있었다.
자신이 그토록 만들어주고 싶었으나, 끝내 주지 못했던 소년 같은 웃음이었다.
"전하, 중전마마께서 드셨습니다."
김 내관이 조씨를 발견하고 고했다.
방 안의 기척이 뚝 끊겼다. 웃음기도, 붓을 놀리던 활기도 순식간에 증발했다.
"들라 하라."
훈의 목소리가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왕의 목소리였다.
조씨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탕약 그릇을 든 손에 힘을 주며 문을 열었다.
훈은 서안 앞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방금 전까지 쓰고 있던 종이나 서책은 보이지 않았다. 책상 위에는 <맹자> 한 권이 펴져 있을 뿐이었다.
"이 늦은 밤에 어인 일이시오."
훈이 짐짓 태연한 척 물었다. 그러나 조씨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훈의 눈가에는 아직 걷히지 않은 설렘의 잔재가 남아 있었고, 뺨은 미세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전하의 침수가 늦어지시기에, 탕약을 가져왔습니다. 안색이... 좋아 보이십니다."
조씨는 탕약을 훈 앞에 내려놓았다. 훈은 헛기침을 하며 그릇을 들었다.
"요즘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져서 말이오. 시간 가는 줄 몰랐군."
"책이라... <맹자>가 그리도 재미있으십니까?"
조씨의 시선이 훈이 급히 덮어둔 책을 향했다. 훈은 뜨끔하여 찻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옛 성현의 말씀은 언제 읽어도 새롭지 않소.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다시금 다잡게 되니,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이 어디 있겠소."
"그렇군요. 성현의 말씀 속에 소리 내어 웃을 만큼 즐거운 구절도 있었던가 봅니다."
"......"
훈은 대답하지 못하고 탕약만 들이켰다. 쓴 약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으나, 그의 표정은 쓰지 않았다.
조씨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훈이 숨기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훈을 웃게 만들었다면 된 것이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은 수년 동안 노력해도 주지 못했던 것을, 이름 모를 책 한 권이, 혹은 그 책 너머의 누군가가 단 며칠 만에 해내고 있었다.
훈이 탕약을 비우자 조씨는 빈 그릇을 챙겨 들었다.
"이제 그만 주무십시오. 내일 경연도 있으시지 않습니까. 좌의정 영감이 벼르고 있다는 소문입니다."
"걱정 마시오. 내일은... 다를 것이오."
훈의 눈빛이 번득였다. 전에는 보지 못했던 자신감이었다.
조씨는 그 눈빛을 마주하며 묘한 안도감과 상실감을 동시에 느꼈다. 왕은 강해지고 있었다.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힘으로.
"예. 편히 쉬십시오."
조씨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왔다.
문이 닫혔다. 훈은 다시금 굳게 닫힌 문 안쪽, 그녀가 닿을 수 없는 자신만의 세계로 돌아갔다.
조씨는 회랑을 걸어 나오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유난히 밝아 눈이 시렸다.
"웃으시니... 되었습니다."
그녀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훈이 행복하다면, 그 이유가 자신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그녀의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헌신이었기에. 하지만 그 헌신의 무게가 오늘따라 유난히 무겁게 느껴져, 그녀는 한참 동안 달을 등지고 서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편전.
공기는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같았다.
경연이 시작되자마자 좌의정 민암이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며칠 전 왕이 꾀병을 부려 조회를 거른 것에 대한 앙금이 남아있는 듯했다.
"전하, 호남 지방의 가뭄이 심각하옵니다. 이는 하늘이 노한 것이니, 부덕을 살피시고 근신하셔야 합니다. 하오나 전하께서는 요즘 궐 밖 출입이 잦으시다 들었습니다. 어찌 국난을 외면하고 유희를 즐기십니까."
민암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훈의 잠행을 꼬투리 잡아 왕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려는 의도였다. 다른 대신들도 수군거리며 동조하는 눈빛을 보냈다.
평소 같았으면 훈은 당황하여 변명을 늘어놓거나, 말문이 막혀 얼굴을 붉혔을 것이다. 민암의 기세에 눌려 "과인의 부덕함이오"라며 고개를 숙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의 훈은 달랐다.
그는 민암을 똑바로 응시했다. 눈빛에 흔들림이 없었다.
"유희라 하셨소?"
훈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내가 궐 밖을 나간 것은 유희를 위함이 아니라, 백성의 삶을 보기 위함이었소. 대감은 가뭄을 하늘 탓으로 돌리며 기우제만 지내라 하지만, 나는 땅에서 답을 찾고 있었소."
"땅에서 답을 찾으시다니요?"
"청나라에서 들여온 신형 수차를 쓰면 물을 높은 곳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하더이다. 하늘만 바라보며 비를 기다리는 것보다, 수차를 만들어 말라가는 논에 물길을 트는 것이 진정 백성을 위하는 길 아니겠소?"
민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왕의 논리가 정연했다. 게다가 그 내용은 며칠 전 자신이 '오랑캐의 기술'이라며 반대했던 <북학의>에 나오는 것이었다.
"하오나 전하, 그것은 검증되지 않은 오랑캐의 기술입니다. 근본을 잃으면..."
"검증은 해보면 될 일 아니오. 대감은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 하시는구려. 그것이 대감이 말하는 도리요?"
훈이 되받아쳤다. 평소 민암의 기세에 눌려 말문이 막히면 입술을 달싹이던 버릇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그 여인, 아니 '신 별감'과 주고받았던 쪽지의 내용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우물 뚜껑을 닫아건 자들이 누구인지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술이 돈이 되면 장인은 절로 모입니다. 밥을 곯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녀가 던진 날카로운 질문들이 훈의 논리가 되고 무기가 되었다. 그녀의 단단한 문장들이 훈의 입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대감은 도리를 논하나, 백성에게는 밥이 도리요. 굶어 죽는 백성 앞에서 성리학의 예법을 논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불충이자 불효가 아니겠소."
훈의 일갈에 편전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민암은 입을 다물었다. 반박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왕의 기세가 전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유약하고 흔들리던 눈빛이 사라지고, 확신에 찬 군주의 눈빛이 그곳에 있었다.
"과연... 전하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사옵니다."
민암이 한발 물러섰다. 대신들도 웅성거리며 왕의 눈치를 살폈다.
훈은 승리의 쾌감을 맛보았다. 이것은 오롯이 자신만의 공이 아니었다. '신 별감'과의 합작품이었다. 그녀가 준 용기가, 그녀가 깨우쳐준 지혜가 이 거대한 벽을 넘게 해주었다
경연이 끝나고 훈은 당당하게 편전을 나섰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전하, 오늘 경연은 참으로 훌륭하셨습니다. 민암 대감이 꼼짝도 못 하더이다."
뒤따르던 김 내관이 신이 나서 말했다. 훈은 빙그레 웃었다.
"내 힘이 아니다. 좋은 스승을 둔 덕분이지."
"스승이라니요? 경연관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훈은 대답 대신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서책방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가서 그녀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당신의 생각이 옳았다고, 우리가 나눈 이야기가 조정의 공기를 바꾸고 있다고.
'오늘도 오겠지.'
훈은 오후를 기다렸다.
그녀에게 해줄 말이, 묻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다.
***
오후, 훈은 평복으로 갈아입고 궐을 나섰다.
운종가로 향하는 발걸음은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나선 참이었다. 어쩌면 그녀와 마주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서책방 '문우사'에 도착한 훈은 익숙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이른 시각이라 손님은 없었다. 훈은 서가 안쪽, 두 사람만의 비밀 우체통이 된 <북학의> 앞으로 갔다.
책은 제자리에 꽂혀 있었다.
훈은 책을 꺼내 펼쳤다.
없었다.
책갈피 사이에는 어제 자신이 남긴 쪽지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녀의 답장은 없었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인가.'
훈은 실망감을 감추며 책을 다시 꽂아두었다.
하긴, 매일같이 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집안에 일이 있거나, 몸이 좋지 않을 수도 있다.
훈은 스스로를 달래며 기둥 뒤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그녀는 반드시 올 테니까.
시간이 흘렀다.
해가 중천을 지나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서책방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길어졌다.
훈은 책 한 권을 펴놓고 글자 하나 읽지 못한 채 입구만 바라보았다.
문이 열릴 때마다 훈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들렸다.
그러나 들어오는 이는 갓 쓴 유생이거나, 심부름 온 아이들뿐이었다. 옥색 치마자락은 보이지 않았다.
초조함이 밀려왔다.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답을 주던 사람이었다. 비가 오는 날에도 젖은 옷자락을 하고서 기어이 다녀갔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훈의 머릿속에 불길한 상상이 스쳤다.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닐까. 혹시 오다가 변을 당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집안 어른들에게 들킨 것은 아닐까.
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책방 주인에게 다가갔다.
"주인장."
"예, 나으리. 찾으시는 책이라도?"
"혹시... 옥색 치마를 입은 여인이 다녀가지 않았소? 늘 저기 안쪽에서 책을 읽던."
주인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오늘은 통 보이질 않으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매일 오시던 분인데, 오늘은 웬일인지..."
훈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오지 않았다.
단순히 늦는 것이 아니었다.
훈은 다시 서가 앞으로 돌아왔다.
아무런 기별도 없이 끊긴 대화. 남겨진 쪽지가 처량해 보였다.
그녀의 안위를 확인할 길이 없다는 사실이 훈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름도, 사는 곳도 모른다. 아는 것이라곤 '신 별감'이라는 가짜 이름뿐.
왕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기다리는 것 외에는.
훈은 해가 질 때까지 서책방을 떠나지 못했다.
어둠이 내려앉고 서책방 주인이 문을 닫을 채비를 할 때쯤에야, 태석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나으리, 이제 환궁하셔야 합니다. 더 늦으면 김 상선이 졸도할 겁니다."
훈은 입술을 깨물었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올 것만 같았다.
"......가자."
훈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서책방을 나서는 훈의 등 뒤로, 문우사의 문이 굳게 닫혔다. 닫힌 문틈 사이로 훈의 쪽지가 끼워진 <북학의>만이 어둠 속에 남겨졌다.
궐로 돌아가는 길, 운종가의 밤거리는 화려했으나 훈의 눈에는 잿빛으로만 보였다.
승리의 기쁨으로 시작했던 하루는 상실감으로 저물어가고 있었다.
훈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구름에 가려 흐릿했다.
"신 별감..."
훈은 나직이 그녀의 가짜 이름을 불러보았다.
내일은 올까.
내일은 그 맑은 글씨를 다시 볼 수 있을까.
훈의 가슴 한구석에 깊은 웅덩이가 패인 듯했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동지애를 넘어선, '그리움'이라는 이름의 깊은 감정이었다.
조회수 2·좋아요 0·1/10/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