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 그림자를 쫓는 그림자
운종가의 뒷골목, 허름한 국밥집 평상에 사내 하나가 앉아 있었다.
남루한 패랭이를 눌러쓴 그는 주막 안을 힐끔거리며 국밥을 깨작거렸다. 겉보기엔 일거리를 찾는 날품팔이꾼 같았으나, 그의 눈빛은 지나치게 예리했다.
그는 박 상궁이 고용한 왈패, '개코'였다.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한다는 자였으나, 이번 의뢰는 찜찜하기 그지없었다.
'중전마마의 명이라니.'
중간책인 박 상궁이 은밀히 건넨 전낭은 묵직했다.
그녀가 요구한 것은 단 하나. '그분'의 뒤를 밟으라는 것.
그분이 누구인가. 바로 조선의 지존, 주상 전하였다.
개코는 혀를 찼다.
세간에는 중전과 주상의 금슬이 나쁘지 않다고 알려져 있었다. 아니, 오히려 중전이 주상을 끔찍이 위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 중전이 지아비의 뒤를 캐라고 시키다니.
'사랑싸움치고는 스케일이 크구만.'
개코는 국물까지 싹 비우고 일어섰다.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곧 그분이 나타날 시간이었다.
운종가 초입.
개코는 인파 속에 섞여 몸을 숨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두 사내가 나타났다.
갓을 쓴 훤칠한 양반과 봇짐을 멘 호위무사. 평복 차림이었으나 기품이 흘러넘치는 그들이었다.
개코는 거리를 두고 그들을 따랐다.
왕의 행선지는 예상 밖이었다. 기생집도, 투전판도 아니었다.
그들이 멈춘 곳은 낡은 서책방 '문우사'였다.
왕은 서책방 안으로 들어갔고, 호위무사는 밖에서 경계를 섰다.
개코는 맞은편 포목점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았다. 지루한 잠복의 시작이었다.
한 시각이 지났을까.
왕이 빈손으로 서책방을 나왔다. 표정은 어두웠다.
왕은 곧장 궐 쪽으로 향했다. 호위무사가 그 뒤를 따랐다.
개코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했다. 너무 싱거웠다.
일국의 왕이 위험을 무릅쓰고 몰래 궐 밖으로 나왔다. 그렇다면 응당 그에 걸맞은 은밀한 유희나 중대한 밀회라도 있어야 마땅했다.
헌데 고작 서책방에 들러 책 냄새만 맡고 돌아간다? 그것도 매일같이?
'냄새가 난다.'
단순한 취미 생활일 리 없었다. 궐 안에도 책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터였다. 굳이 여기까지 나와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책이 아니라 '사람' 때문일 것이다.
개코는 왕을 따라가지 않았다.
박 상궁의 지시는 왕의 동선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왕이 떠난 저 서책방에 아직 드러나지 않은 비밀이 남아 있음이 분명했다.
개코는 시선을 문우사에 고정했다.
드나드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폈다. 갓 쓴 유생, 책 심부름 온 아이, 흥정하러 온 거간꾼. 모두 평범한 사내들이었다.
'대체 누굴 만난다는 거야.'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개코가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켤 때였다.
서책방 골목 어귀로 누군가 급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장옷을 깊게 눌러쓴 여인이었다.
여인의 걸음걸이는 다급했고, 주위를 살피는 눈빛은 불안했다.
개코의 눈이 번뜩였다.
여인이다.
사내들만 드나드는 서책방에, 그것도 해가 질 무렵에 혼자 나타난 여인. 수상쩍기 짝이 없었다.
여인은 서책방 안으로 쏙 들어갔다.
개코는 자세를 낮추고 기다렸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잠시 후, 여인이 다시 나왔다. 들어갈 때보다 한결 가벼워진 표정이었으나, 여전히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여인은 운종가를 벗어나 북촌 방향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개코는 모자를 눌러쓰고 그녀의 뒤를 밟았다.
여인은 좁은 골목길을 이리저리 빠져나갔다. 지리에 꽤 밝은 듯했다.
그녀가 멈춘 곳은 북촌에서도 가장 으리으리한 기와집들이 모여 있는 동네였다.
개코는 숨을 죽였다.
여인이 향한 곳은 높은 담장이 둘러쳐진 대갓집이었다.
솟을대문에는 횃불이 켜져 있었고, 하인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여인은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담벼락을 따라 뒤편으로 돌아갔다.
개코는 담장 너머의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여인이 작은 쪽문을 살짝 열었다. 안에서 누군가 여인을 맞이했다.
쪽문이 닫히기 직전, 개코는 횃불에 비친 문패를 보았다.
[좌의정 민암].
개코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좌의정 댁이라니. 조선 천지에서 새도 떨어뜨린다는 그 민 대감 댁이 아닌가.
'설마 저 여인이...'
개코는 침을 꿀꺽 삼켰다.
왕이 몰래 들르는 서책방, 그리고 그곳을 드나드는 좌의정 댁 여인.
이것은 단순한 치정이 아니었다. 잘못 건드리면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거대한 불씨였다.
개코는 조용히 뒷걸음질 쳤다.
이 사실을 중전에게 알려야 했다. 돈을 더 받아야겠다는 생각과, 발을 빼야겠다는 생각이 동시에 머릿속을 스쳤다.
어둠이 내려앉은 북촌 거리.
개코는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좌의정 댁의 높은 담장만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
그날 밤, 교태전.
박 상궁이 물러간 뒤, 조씨는 한동안 촛불 앞에 앉아 있었다.
개코가 전해온 소식은 충격이었다. 왕이 몰래 만나던 그 '벗'이 다름 아닌 좌의정 민암의 며느리라니.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구나.'
조씨는 입술을 깨물었다.
단순히 왕이 여인을 만났다는 사실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 여인이 왕권을 가장 위협하는 정적의 며느리라는 것이 문제였다.
만약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진다면, 민암은 이를 빌미로 왕의 도덕성을 공격하고 탄핵까지 거론할 것이다.
'전하께 알려야 한다.'
지금이라도 그 여인의 정체를 알리고, 발길을 끊게 해야 했다. 그것이 왕을 지키는 길이었다.
조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전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왕이 받을 충격이 눈에 선했으나, 더 큰 화를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전하, 중전마마 드시옵니다."
김 내관의 고함과 함께 문이 열렸다.
훈은 서안 앞에 앉아 있었으나, 붓을 들지는 않았다. 읽던 책은 덮여 있었고, 시선은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며칠 전의 활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밤이 늦었습니다."
조씨는 훈의 맞은편에 앉았다. 훈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전도 잠이 오지 않으시는구려."
"드릴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조씨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단호했다. 훈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오?"
"전하께서 최근 궐 밖에서 만나시던 그분에 관한 일입니다."
훈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이야기는... 그만두자고 하지 않았소."
"아니요. 들으셔야 합니다. 전하께서 누구를 만나고 계셨는지, 그 만남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셔야 합니다."
조씨는 숨을 고르며 입을 열려 했다.
'그 여인은 좌의정의 며느리입니다.' 그 한마디면 모든 것이 끝날 터였다.
"그만두시오."
훈이 말을 잘랐다.
"더 이상... 만날 일은 없을 것이오."
조씨는 멈칫했다. 훈의 표정은 건조했다. 체념인지, 결심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안 가실 겁니까?"
"안 가오. 아니, 못 가오."
훈은 씁쓸하게 웃었다.
"중전의 말이 옳았소. 그저 스쳐 가는 인연이었소. 며칠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을 보니, 그이에게는 내가, 아니 '김 선비'가 그저 한때의 말동무 정도였던 모양이오."
"......"
"이제 마음을 접었소. 왕이 되어가지고 이름 모를 이의 부재에 휘둘려 국사를 그르칠 뻔했으니, 부끄러울 따름이오. 중전 덕분에 정신을 차렸소."
훈의 말은 담담했으나, 그 속에 담긴 공허함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었던 구멍이 막혀버린 사람의 얼굴이었다.
조씨는 입을 다물었다.
민암의 며느리라는 사실을 밝히려던 말이 목구멍 뒤로 넘어갔다.
이미 왕 스스로 발길을 끊겠다고 했다. 만남이 끝난 마당에 굳이 그 여인의 정체를 밝혀 왕에게 더 큰 상처를 줄 필요는 없었다.
'다행... 인가.'
이성적으로는 다행이었다. 왕이 위험한 스캔들에 휘말릴 일도, 좌의정에게 약점을 잡힐 일도 사라졌으니.
하지만 조씨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왕은 안전해졌으나, 다시 불행해졌다.
며칠 전, 서책을 읽으며 아이처럼 웃던 그 생기 넘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다시금 옥좌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고독을 견뎌야 하는 군주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조씨는 애써 덤덤하게 말했다.
"한때의 즐거움으로 남겨두시는 것이 좋습니다. 전하께는 돌봐야 할 백성이 있고, 지켜야 할 조정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내 자리가 그런 곳이지."
훈은 자조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하구려. 오늘은 일찍 쉬어야겠소."
혼자 있고 싶다는 뜻이었다.
조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편히 쉬십시오."
대전을 나서는 조씨의 발걸음은 들어올 때보다 더 무거웠다.
문이 닫히고, 훈의 그림자가 문풍지 위로 길게 늘어졌다. 그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조씨는 회랑을 걸으며 생각했다.
왕을 지키기 위해 그 여인을 떼어놓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그 대가로 왕이 잃어버린 웃음은 누가 찾아줄 수 있을까.
자신은 왕의 정치적 동반자는 될 수 있어도, 그를 웃게 만드는 '벗'은 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한 밤이었다.
조씨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구름 뒤로 숨어버렸다. 궐 안은 다시금 완벽한 어둠과 침묵 속에 잠겼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모든 것이 이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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