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두레박과 우물
이튿날, 훈은 다시 평복으로 갈아입었다.
익선관을 벗고 갓을 쓰는 손길이 어제보다 한결 가벼웠다.
"전하, 오늘도 나가시렵니까?"
상선 김 내관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어제야 좌의정의 요양 덕에 조정이 비었지만, 오늘은 평소대로 정무가 돌아가는 날이었다.
"오전에 잡힌 경연은 핑계를 대고 미루었다. 오후에 있을 병조 판서와의 독대 전까지는 돌아올 것이다."
"하오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입니다. 연이틀 잠행이라니요."
"숨 쉴 구멍을 찾으라던 중전의 말을 잊었느냐. 어제 하루 바람을 쐬었더니 막혔던 혈이 뚫리는 기분이다. 딱 두 시각(4시간)이다. 그 안에 올 테니 걱정 마라."
훈은 김 내관의 잔소리를 뒤로하고 서둘러 궐을 나섰다.
그의 품 안에는 어젯밤, 고심 끝에 적은 쪽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왕으로서 적은 것이 아니라, 한 명의 독자로서 같은 책을 읽던 이름 모를 학우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운종가의 오후는 어제보다 분주했다.
훈은 익숙한 걸음으로 서책방 '문우사'로 향했다. 거리를 걷는 내내 심장이 기분 좋게 박동했다.
'왔을까.'
어제 마주친 그 여인이 오늘도 그곳에 있을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규방의 여인이 매일같이 바깥출입을 한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어쩌면 어제 본 모습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훈은 그 찰나의 눈빛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토록 절박하게 활자를 좇던 눈이라면, 분명 다시 올 것이라 생각했다.
서책방에 들어선 훈은 갓의 챙을 살짝 들어 주위를 살폈다.
손님 두어 명이 서성이고 있었으나, 옥색 치마를 입은 여인은 보이지 않았다. 훈은 안도감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끼며 서가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제 그녀가 읽다 둔, 그리고 훈이 샀다가 도로 놓고 온 그 <북학의>가 제자리에 꽂혀 있었다. 주인에게 미리 언질을 주어 팔지 말라고 해둔 덕분이었다.
훈은 책을 꺼냈다. 그리고 품에서 미리 준비한 쪽지를 꺼냈다.
잘 다듬어진 한지 위에 정갈한 필체로 적힌 문장이었다.
[우물의 물은 퍼내지 않으면 썩는 법이나, 두레박이 없으면 퍼낼 수조차 없다. 그대는 두레박을 어디서 구하려 하는가.]
박제가의 소비론은 훌륭하나, 그것을 실현할 도구와 주체가 조선에 부재하다는 현실적인 지적이었다. 훈은 쪽지를 책갈피 사이에 끼워 넣었다. 어제 그녀가 멈췄던 페이지, 재물을 우물에 비유한 그 대목이었다.
훈은 책을 다시 서가에 꽂아두었다. 눈에 잘 띄도록 책등이 살짝 튀어나오게 두는 소심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나으리, 여기서 기다리실 겁니까?"
태석이 지루한 듯 물었다.
"그래. 잠시 책이나 좀 보겠다."
훈은 서책방 구석, 기둥 뒤편에 자리를 잡았다.
입구가 잘 보이는 명당이었다. 그는 다른 책을 한 권 꺼내 펼쳤으나,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선은 줄곧 문지방을 넘나드는 사람들의 발끝에 머물렀다.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나이 지긋한 유생이 들어왔다 나가고, 심부름 온 아이가 언문 소설책을 사 갔다. 하지만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았다.
'오지 않는 것인가.'
훈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책을 덮으려던 찰나였다.
문지방 위로 옥색 치마 자락이 스치듯 넘어왔다.
훈의 손이 멈췄다.
그녀였다.
어제와 같은 단정한 옥색 치마저고리 차림이었으나, 오늘은 얼굴을 가리기 위해 얇은 장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서책방에 들어서자마자 주위를 빠르고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혹은 남의 눈을 피해야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훈은 본능적으로 몸을 기둥 뒤로 숨겼다.
여인은 곧장 서가 안쪽으로 향했다. 망설임 없는 걸음걸이였다.
그녀는 훈이 살짝 빼어둔 <북학의>를 발견하고는 자연스럽게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어제 앉았던 그 좁은 평상, 서가와 벽 사이의 은밀한 공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기둥 뒤에서 훔쳐보는 훈의 심장이 늑골을 때리듯 거세게 뛰었다.
정말로 왔다.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사락, 사락.
규칙적이고 고요한 소리가 서책방의 소음을 덮었다.
그리고 잠시 후, 손길이 멈췄다.
여인은 책갈피 사이에 끼워진 종이를 집어 들었다.
미간이 좁혀졌다. 누군가 책에 이물질을 남겨두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여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종이를 펼쳤다.
훈은 숨을 죽이고 그녀의 표정 변화를 살폈다.
무심하던 그녀의 눈동자가 문장을 읽어내려가며 서서히 커졌다.
당황스러움, 그리고 이내 호기심으로 바뀌는 과정이 훈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여인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 글을 쓴 주인을 찾는 눈빛이었다. 훈은 책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의 시선이 훈이 있는 기둥 쪽을 스쳐 지나갔다.
다시 시선을 종이로 돌린 여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비웃음이 아니었다. 뜻밖의 수수께끼를 만난 학자의 즐거움, 혹은 자신과 같은 고민을 하는 이를 발견한 반가움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책방 주인에게 다가가 무언가 짧게 이야기하더니, 붓과 벼루를 빌려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여인은 책 위에 종이를 받쳐 놓고 붓을 들었다.
망설임 없는 손놀림이었다. 먹을 찍어 글을 써 내려가는 그녀의 모습은 규방의 여인이라기보다 과거 시험장에 앉은 유생 같았다. 하얀 손목이 우아하게, 그러나 힘 있게 움직였다.
잠시 후, 여인은 붓을 내려놓고 입으로 후, 불어 먹을 말렸다.
그녀는 자신이 쓴 글을 훈이 남긴 쪽지 아래에 덧붙여 접었다. 그리고 다시 책갈피 사이에 끼워 넣었다.
책을 덮은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오래 머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책을 제자리에 꽂아두고, 장옷을 여미며 서책방을 빠져나갔다.
여인의 뒷모습이 문밖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훈은 책을 내렸다.
긴장으로 굳어있던 어깨가 그제야 풀렸다.
"가셨습니다, 나으리."
태석이 알려주었다. 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이 급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남겼을까.
훈은 그녀가 앉았던 평상으로 다가가 <북학의>를 꺼냈다.
아직 그녀의 체온이 남아있는 듯한 책을 펼쳤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쪽지를 폈다.
자신이 쓴 글씨 아래에, 흘림체지만 뼈대가 굵은 필체로 쓴 답글이 적혀 있었다.
[물이 맑고 달다면, 사람들은 표주박이 없어도 손으로 떠서 마실 것입니다. 두레박이 없는 것을 탓하기 전에, 우물 뚜껑을 닫은 자들이 누구인지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훈은 멍하니 문장을 응시했다.
머릿속에서 종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훈은 제도의 부재를 탓했으나, 그녀는 제도를 막고 있는 기득권의 폐쇄성을 꼬집었다.
'우물 뚜껑을 닫은 자들'.
그것은 명분론에 사로잡혀 개혁을 반대하는 좌의정 민암과 조정 대신들을 향한 통렬한 일침이었다.
"허..."
훈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대담했다. 그리고 명쾌했다.
조정의 그 어떤 대신도 왕 앞에서 이렇게 직설적으로 본질을 찌르지 못했다. 수천 권의 책을 읽은 대학자들에게서도 듣지 못한 답을, 저잣거리의 이름 모를 여인에게서 들을 줄이야.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것은 단순한 문답이 아니었다. 신분도, 성별도, 나이도 떼어놓고 오직 '생각'만으로 나누는 교감이었다. 왕이라는 자리 때문에 누구와도 깊이 나누지 못했던 진짜 대화가 이곳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태석아."
"예."
"붓을 가져오너라."
"예?"
"답을 해야겠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어."
훈은 주인에게 붓을 빌려오게 했다.
그는 여인의 글씨 아래에,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다시 글을 적어 내려갔다.
[그대의 통찰이 날카롭소. 나는 껍데기만 보고 본질을 놓쳤구려. 허나 뚜껑을 닫은 자들이 힘을 쥐고 있으니 어찌하오? 뚜껑을 여는 힘은 어디서 구해야 하겠소?]
글 아래에 자신의 가명도 남겼다.
[나는 김 선비라 하오.]
왕의 성인 이씨를 쓸 수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왕이 아닌 한 명의 선비로서 그녀와 대등하게 대화하고 싶었다.
훈은 종이를 다시 책에 끼워두었다.
내일 그녀가 다시 올까? 와서 이 글을 볼까?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훈은 이 책이, 그리고 이 서책방이 두 사람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돌아가자."
훈은 책을 제자리에 꽂아두고 서책방을 나섰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궐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어제보다 훨씬 가벼웠다.
***
그날 밤, 북촌 좌의정 댁.
혜인은 하인들의 눈을 피해 겨우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시아버지가 없는 틈을 타 몰래 나갔다 온 길이었다. 다행히 들키지는 않았으나,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혜인은 촛불을 켜고 앉았다.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서책방에서의 일이 자꾸만 떠올랐다.
책 속에 남겨진 쪽지.
처음엔 누군가의 장난인 줄 알았으나, 문장은 진지했고 고민은 깊었다. 조선의 현실을 우물에 비유하다니, 보통 식견을 가진 자가 아니었다.
혜인은 자신이 쓴 답글을 곱씹었다.
'우물 뚜껑이라니. 내가 미쳤지.'
다소 과격한 표현이었다. 시아버지 민암이 알았다면 당장 쫓겨날 만한 불온한 생각이었다. 양반가 며느리가 나라의 정치를 논하고, 기득권을 비판하다니.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울분과 생각을 토해낼 수 있는 대나무 숲을 찾은 기분이었다.
'혹여... 다시 답이 올까?'
혜인은 문득 불안해졌다.
여인의 필체임을 알아보고 무시해버리면 어쩌나. 아니,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라 내 글을 보지도 못하면 어쩌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일 다시 서책방에 갈 수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혜인은 상상을 멈출 수 없었다. 이 숨 막히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숨통이 트이는 상상이었다.
만약 그가 내 글을 읽고, 또 다른 질문을 던져온다면.
그래서 이 위태로운 대화가 이어진다면.
'그때는... 나를 숨겨야겠지.'
좌의정 댁 며느리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싶었다. 여인이라는 한계도 지우고 싶었다. 오직 생각과 생각만이 부딪치는 대등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러려면 이름이 필요했다. 양반가의 규수가 아닌, 세상사를 논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내의 이름이.
문득 친정의 먼 친척 중에 별감 노릇을 하던 어른이 떠올랐다. 비록 벼슬은 낮았으나 궐 안팎을 자유롭게 오가며 호방하게 살던 분이었다.
그래, 그분의 직함을 빌려 ‘신 별감’이라 칭한다면, 부녀자가 아닌 한 명의 관리로서 그와 마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혜인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거짓된 탈을 쓰는 일이었으나, 역설적이게도 그 탈을 써야만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붓을 씻어 필통에 꽂고, 서안을 정갈하게 정리했다.
방 안을 채우던 묵향이 오늘따라 유난히 향긋하게 느껴졌다.
창밖에는 어느새 그믐달이 기울고 있었다.
혜인은 촛불을 끄며 어둠 속에서 조용히 미소 지었다.
내일 서책방의 문턱을 넘는 순간, 그녀는 더 이상 숨죽인 좌의정 댁 며느리가 아닐 것이다.
오직 글과 뜻으로만 존재하는 사람, '신 별감'이 되어 그를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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