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그림자로 사는 여자
북촌의 가장 높은 언덕, 대문이 위압적으로 버티고 선 기와집.
조선의 실세, 좌의정 민암의 저택이었다.
혜인은 대문 앞에 멈춰 서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방금 전까지 운종가의 서책방에서 느꼈던 자유로운 공기는 이곳에 닿는 순간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익숙한 표정을 얼굴에 덧씌웠다.
감정도, 욕망도 드러나지 않는 무표정한 며느리의 가면이었다.
"다녀오셨습니까, 마님."
대문이 열리자 하인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태도는 정중했으나, 그 너머에는 미묘한 건조함이 서려 있었다. 이 집안에서 혜인의 위치가 그러했다. 안방마님이지만 실권이 없고, 며느리지만 식구로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
혜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안채로 향했다.
잘 가꿔진 정원수들이 늘어선 마당은 티끌 하나 없이 정갈했다. 하지만 그 정갈함은 사람의 온기가 배제된 삭막함과 같았다.
안채 대청마루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좌의정 민암이 요양을 핑계로 별장에 가 있기에 집안은 평소보다 더욱 고요했다. 혜인은 그것이 다행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숨이 막혔다. 주인이 없는 집에서도 주인의 시선이 느껴지는 탓이었다.
혜인은 자신의 처소인 서쪽 별채로 들어갔다.
방문을 닫고 걸쇠를 걸자마자, 몸종 연이가 다가와 혜인의 겉옷을 받아 들었다.
"아기씨... 아니, 마님. 별일 없었어?"
친정에서 데려온 유일한 아이, 연이는 남들이 보지 않을 때면 종종 혜인을 예전 호칭으로 부르거나 말을 놓았다. 그녀는 혜인이 친정에서 서얼이라 구박받을 때부터 유일하게 혜인의 밥을 챙겨주던 아이였다.
이 살벌한 시댁에서 혜인이 마음 놓고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구멍이었다.
"그래. 조용하더구나."
혜인은 그제야 어깨에 들어갔던 힘을 풀고 자리에 앉았다. 품에 안고 온 <북학의>를 서안 위에 올려놓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서책방에서의 짧은 일탈은 꿈처럼 아득했고, 눈앞의 현실은 납 덩어리처럼 무거웠다.
이 집안에서 혜인은 '없는 사람'이었다.
시아버지 민암에게 며느리란 대를 이을 도구이자, 가문의 격식에 맞춰 자리를 채우는 장식품에 불과했다. 그는 혜인에게 말을 거는 법이 드물었고, 눈을 마주치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밥은 먹었느냐?" 혹은 "아범에게서 기별은 없고?"
그 건조한 물음 몇 마디가 대화의 전부였다.
남편 민기준 또한 다르지 않았다.
조정의 젊은 실력자, 차가운 엘리트라 불리는 사내. 그는 혜인에게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혼인한 지 3년이 지났으나,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대화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지금 그는 청나라에 사신으로 떠나 있었다.
남편의 부재는 혜인에게 외로움이 아닌 안도감을 주었다. 적어도 그가 집에 있는 동안 느껴야 하는 서늘한 긴장감에서는 해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이 반쪽이야. 점심상은 어찌할까? 뭐라도 좀 챙겨올까?"
연이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혜인의 얼굴을 살폈다. 혜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각 없다. 물이나 한 잔 다오."
"또 입맛 없지? 에휴, 친정에선 구박덩어리더니 시집와선 보릿자루 신세니 원. 속이 편할 날이 있어야지."
연이는 투덜거리면서도 따뜻한 물을 부어 내밀었다. 혜인은 피식 웃으며 물잔을 받았다. 연이의 저 거침없는 타박이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혜인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거울을 보았다.
단아한 이목구비의 여인이 거울 속에 있었다. 몰락했지만 뼈대 있는 가문인 신씨 집안의 여인이었고, 남들이 보기엔 부러울 것 없는 좌의정 댁으로 시집 온 며느리.
하지만 혜인은 알고 있었다. 거울 속 여인이 철저한 거짓말쟁이임을.
그녀는 서얼이었다.
아버지는 신씨 가문의 양반이었으나, 어머니는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은 관노비 출신이었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서얼은 양반의 피를 받았어도 온전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벼슬길은 막혀 있으며, 집안의 대소사에도 끼지 못하는 존재.
그런 그녀가 좌의정 댁 정실부인이 된 것은 거대한 사기극이었다. 3년 전, 민암 대감은 가문의 이미지를 세탁하기 위해 청렴하기로 소문난 신씨 가문과의 혼인을 추진했다.
당시 혼담이 오가던 혜인의 이복언니가 급병으로 사망하자, 빚에 쪼들리던 친정아버지는 혜인을 적녀로 둔갑시켜 시집보냈다.
'가서 죽은 듯이 살아라. 네가 서출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우리 가문은 멸문지화다.'
아버지의 그 말이 족쇄가 되어 혜인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녀는 매일 밤 악몽을 꾸었다. 가면이 벗겨지고, 천한 핏줄임이 드러나 멍석말이를 당하는 꿈.
민기준이나 민암 대감이 혜인을 투명 인간 취급하는 것은 차라리 다행이었다. 관심을 받으면 비밀이 드러날까 두려웠기에, 혜인은 스스로 그림자가 되기를 자처했다.
"으앙..."
그때, 멀리 행랑채 쪽에서 희미한 아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혜인의 귀가 번쩍 뜨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살짝 열었다.
"선우 도련님이 또 우시는 모양입니다."
연이가 혀를 차며 말했다.
"유모는 어디 가고 아이가 저리 울도록 둔다니."
"보나 마나 뒷방에서 노름이나 하고 있겠지요. 도련님이 첩의 자식이라고 천대하는 것이 하루 이틀입니까."
선우.
남편 민기준이 밖에서 데려온 아이였다. 다섯 살배기 사내아이.
민기준은 아이의 생모에 대해 입을 다물었으나, 집안사람들은 모두 기생이나 천민의 자식일 거라 수군거렸다.
가장 콧대 높은 양반가인 민씨 집안에서, 족보에도 오르지 못한 서자는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다. 민기준조차 아이를 쳐다보지 않았다. 아니, 혐오스러워했다. 자신의 흠집이라 여기는 듯했다.
혜인은 방문을 열고 나갔다.
그녀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안채가 아닌, 집안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낡은 행랑채였다.
방문을 열자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작은 아이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 밥그릇에는 말라비틀어진 찬밥 덩어리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도련님."
혜인이 부드럽게 불렀다. 아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눈물 범벅이 된 얼굴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혜인은 치맛자락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닥에 앉아 아이를 품에 안았다. 아이는 뻣뻣하게 굳어 있다가, 혜인의 체온이 느껴지자 조심스럽게 파고들었다.
"배가 고프셨지요."
혜인은 품속에서 하얀 백설기 한 덩이를 꺼냈다. 아까 들어오는 길에 몰래 챙겨둔 것이었다. 아이가 허겁지겁 떡을 베어 물었다. 목이 메일까 봐 연이가 가져온 물을 먹여주며, 혜인은 아이의 거친 머릿칼을 쓸어넘겼다.
동병상련.
혜인이 이 아이를 외면할 수 없는 이유였다.
천한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죄인 취급받는 삶. 혜인은 선우의 눈동자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았다.
'너도... 사는 것이 고단하겠구나.'
남편이 밖에서 낳아온 자식. 보통의 아내라면 증오해야 마땅할 존재.
하지만 혜인에게 선우는 남편의 배신을 상기시키는 증거가 아니라, 이 거대한 기와집 감옥에 갇힌 유일한 수감 동료였다.
"천천히 드세요. 체합니다."
아이의 등을 토닥이는 혜인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아이를 돌보며 위안을 얻었으나, 동시에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확인받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신분의 굴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 작은 아이에게 몰래 밥을 먹이고, 남들 눈을 피해 숨을 죽이는 것뿐이었다.
***
밤이 깊었다.
달빛이 창호지 문을 은은하게 비췄다.
집안의 모든 불이 꺼지고 하인들도 잠든 시간. 혜인은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촛불 하나를 켜고, 아까 사 온 <북학의>를 펼쳤다.
이 시간만이 혜인이 온전한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그녀는 글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아니, 좋아한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것은 생존 본능에 가까웠다.
책 속의 세상에는 서얼도, 양반도 없었다. 오직 논리와 이치만이 존재했다.
신분 때문에 무시당하고, 여자라는 이유로 억압받는 현실. 그 비참함을 잊기 위해 혜인은 활자에 매달렸다. 머릿속에 지식을 채워 넣을 때만큼은 자신이 껍데기뿐인 가짜가 아니라, 생각하고 살아있는 인간임을 느낄 수 있었다.
혜인은 낮에 읽다 만 부분을 다시 읽어 내려갔다.
[수레를 쓰지 않으면 물자가 돌지 않고, 물자가 돌지 않으면 백성은 영원히 가난을 면치 못한다.]
박제가의 문장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혜인의 가슴을 찔렀다.
가난하고 꽉 막힌 조선의 현실은, 출신 성분에 묶여 재능을 펼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와 닮아 있었다.
'길을 내야 한다. 막힌 것을 뚫고 흐르게 해야 한다.'
혜인은 책장을 넘기다 문득 멈췄다.
오늘 아침, 서책방에서 마주쳤던 사내가 떠올랐다.
갓을 쓴 훤칠한 키에, 옥색 도포가 잘 어울리던 남자.
양반집 자제 같았으나 어딘가 엉성하고 어수룩해 보이던 사람.
그는 혜인을 보고 놀란 토끼 같은 눈을 했었다. 말을 걸려다 말고 얼굴을 붉히며 도망치던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순수해 보이기도 했다.
'그분도 이 책을 보고 계셨지.'
양반 사대부들은 이 책을 불온서적이라며 손가락질한다. 시아버지 민암 대감은 "그런 책을 읽으면 정신이 썩는다"며 혜인의 책을 뺏어 불태운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 사내는 이 책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혜인에게 말을 걸려 했다.
경멸의 눈빛이 아니었다.
"계집이 어찌 이런 책을?" 하는 비난의 눈빛도 아니었다.
그것은... 호기심이었다. 아니, 어쩌면 갈망이었을지도 모른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던 걸까.'
혜인은 턱을 괴고 촛불을 바라보았다.
그가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을까 상상해 보았다. 책의 내용에 관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히 길을 물으려던 것이었을까.
이름 모를 사내를 생각하는 것은 불경한 일이다.
하지만 혜인은 그 상상을 멈출 수 없었다. 이 숨 막히는 집안에서, 자신과 같은 곳을 바라보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묘한 위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
혜인은 고개를 저어 잡념을 떨쳐냈다.
부질없는 일이다. 그는 스쳐 가는 바람 같은 인연일 뿐이다. 다시 만날 일도 없거니와, 만난다 한들 좌의정 댁 며느리와 이름 모를 선비가 나눌 수 있는 대화는 없다.
혜인은 다시 책에 집중하려 애썼다.
하지만 글자들 사이로 자꾸만 그 사내의 당황한 표정이 아른거렸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는 이미 새벽닭이 울기 직전이었다.
혜인은 뻐근한 목을 돌리며 촛불을 껐다.
어둠이 방 안을 채웠다. 다시 차가운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내일이면 시아버지가 별장에서 돌아올 것이다.
그러면 다시 숨죽인 그림자로, 감정 없는 인형으로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혜인은 어둠 속에서 <북학의>의 표지를 쓰다듬었다.
아직 다 이해하지 못한 구절들이 있었다. 그리고 서책방에는 읽고 싶은 책들이 더 많이 남아 있었다.
'내일도... 갈 수 있을까.'
위험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 번 맛본 달콤한 공기는 쉽게 잊히지 않았다. 그 서책방에 가면, 왠지 그 어수룩한 선비가 다시 서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혜인은 이불을 끌어당기며 눈을 감았다.
내일은,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다시 그곳에 가고 싶었다.
조회수 4·좋아요 0·1/2/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