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뜻밖의 독자
서책방 '문우사'의 문지방을 넘어서자, 묵은 종이 냄새와 그윽한 먹향이 가득했다.
이른 아침이라 손님은 거의 없었다. 주인으로 보이는 노인이 계산대 뒤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을 뿐, 내부는 고요했다. 천장에 닿을 듯 높게 쌓인 책장 사이로 먼지가 햇살을 타고 부유했다.
훈은 갓끈을 매만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집현전이나 규장각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그곳의 책들이 잘 다듬어진 정원수 같다면, 이곳의 책들은 제멋대로 자라난 야생초 같았다. 사서삼경 옆에 언문 소설이 놓여 있고, 족보 책 옆에 중국에서 들여온 실학서들도 무질서하게 꽂혀 있었다.
"나으리, 찾으시는 책이라도 있으십니까?"
뒤를 따르던 호위무사 태석이 낮게 물었다. 그는 봇짐 장수 행색을 했으나, 날카로운 눈매로 서책방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었다.
"글쎄다. 딱히 정해두고 온 것은 아니다."
훈은 뒷짐을 진 채 서가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그의 손가락이 책등을 훑고 지나갔다. <택리지>, <산림경제> 등 백성들의 삶과 직결된 실용서들이 눈에 띄었다. 조정의 고관들은 '잡서'라 칭하며 거들떠보지도 않을 책들이었으나, 이곳에서는 가장 손때가 많이 묻어 있었다.
훈의 발걸음이 서책방 가장 안쪽, '신간'이라 적힌 나무 팻말 앞에서 멈췄다.
그곳에는 청나라 연경을 다녀온 사신들이나 역관들이 몰래 들여온 서적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훈은 그중 한 권을 집어 들었다. <북학의>.
박제가가 쓴 책이었다. 어제 경연에서 좌의정 민암이 입에 거품을 물고 비난했던 바로 그 책이었다.
'오랑캐의 문물이라...'
훈은 책장을 넘겼다.
책 속에는 수레를 이용한 물류의 혁신, 벽돌을 이용한 건축, 상업의 장려 등 조선의 가난을 타개할 구체적인 방안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문장은 거침없었고, 논리는 명쾌했다.
훈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스쳤다.
궐 안에서는 금기시되는 사상이, 궐 밖에서는 누구나 돈 몇 푼이면 읽을 수 있는 상식이 되어 있었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세상은 이토록 다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훈이 책에 몰입해 있을 때였다.
서가 너머,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오는 창가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훈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시선이 멈췄다.
사람이 있었다.
서가와 벽 사이, 좁은 틈새에 마련된 작은 평상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여인이었다.
남색 띠를 두른 옥색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인이었다. 쪽 찐 머리에는 비녀 하나 꽂혀 있지 않았고, 옷감은 고급 비단이 아닌 명주였으나 구김 없이 단정했다.
훈은 미간을 좁혔다.
이른 시각 서책방에 여인이 있는 것도 드문 일이었으나, 그녀가 읽고 있는 책이 더욱 의외였다.
보통의 규방 여인들이라면 <구운몽>이나 <사씨남정기> 같은 언문 소설을 읽을 터였다. 허나 그녀의 손에 들린 책은 표지에 한자로 <북학의>라 적혀 있었다.
훈이 방금 집어 들었던 것과 같은 책이었다.
'여인이 실학을?'
호기심이 일었다.
기생인가 싶어 얼굴을 살폈으나, 화장기 없는 말간 얼굴과 정갈한 자태는 기생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양반가의 규수인가. 허나 사대부 집안의 여식이 아침부터 호위도 없이 이런 곳에 나와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여인은 주변의 인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한 듯했다.
그녀의 시선은 책장에 고정되어 있었다. 책장을 넘기는 손길은 느렸으나 신중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문장을 곱씹는 모습이 마치 난해한 경전을 해석하는 노학자처럼 진지했다.
창호지 문을 통과한 아침 햇살이 그녀의 옆얼굴 위로 쏟아졌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들이 빛을 받아 금가루처럼 반짝였다. 그 정적인 풍경 속에서 오직 그녀만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훈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가까이서 확인하고 싶었다. 정말로 그 책을 읽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겉만 훑고 있는 것인지.
한 발, 두 발.
훈과 여인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가까이 다가가자 은은한 난초 향이 묵향 사이로 스며들었다.
여인은 책의 한 구절에서 멈춰 있었다. 훈의 시선이 그녀가 보고 있는 페이지를 훔쳐보았다.
'재물을 우물에 비유하는 대목이로군.'
소비가 곧 생산을 낳는다는 박제가의 핵심 이론이었다. 조정의 대신들은 '사치와 낭비를 조장한다'며 펄쩍 뛰었던 부분이다.
그녀는 그 대목을 읽고 또 읽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혐오나 거부감이 아닌, 깊은 동경과 갈망이 서려 있었다.
훈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려 했다.
묻고 싶었다. 그 문장이 그대에게는 어떻게 읽히느냐고. 좌의정 민암이 말하는 '도리'와 이 책이 말하는 '실리' 중 어느 것이 옳다고 생각하느냐고.
"저..."
훈의 입술이 떨어졌다.
그 작은 소리에,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책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훈에게로 옮겨왔다.
훈은 숨을 멈췄다.
맑았다.
속이 훤히 비칠 듯 투명하면서도, 바닥을 알 수 없을 만큼 깊은 눈동자였다. 그 눈에는 낯선 사내에 대한 경계심과, 독서를 방해받은 것에 대한 찰나의 당혹감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훈을 압도한 것은 그런 감정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단함'이었다.
자신의 세계에 온전히 몰입해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침범할 수 없는 견고한 분위기.
훈은 준비했던 말을 잊어버렸다.
왕으로서 수많은 신하를 거느리고, 경연에서 날고 기는 학자들과 논쟁을 벌여왔던 그였다. 허나 지금 이 순간, 이름 모를 여인의 고요한 눈빛 앞에서 그는 말문이 막혔다.
"아..."
입안에서 맴돌던 문장들이 혀 끝에서 흩어졌다.
무슨 말을 해도 가벼워 보일 것 같았다. '여인이 어찌 이런 책을 읽느냐'는 질문은 그녀의 진지함에 대한 모욕처럼 느껴졌고, '내용이 어렵지 않으냐'는 질문은 오만이 될 것 같았다.
훈은 엉거주춤하게 입을 벌린 채 서 있었다.
갓끈을 잡은 손에 땀이 배었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그것은 연정이라기보다는, 예상치 못한 강적을 만났을 때 느끼는 긴장감에 가까웠다.
여인은 훈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쩔쩔매자,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그녀의 시선이 훈의 얼굴에서 옷차림으로, 다시 훈의 손에 들린 <북학의>로 옮겨갔다.
그녀의 눈매가 미세하게 부드러워졌다. 자신과 같은 책을 든, 어수룩해 보이는 선비에 대한 동질감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훈은 그 찰나의 부드러움을 포착할 여유가 없었다.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들킨 것만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
훈은 뒷걸음질 쳤다.
말을 거는 것을 포기했다. 지금의 자신은 그녀와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 기묘한 패배감을 안고서는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훈은 도망치듯 몸을 돌렸다.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나으리?"
뒤에서 지켜보던 태석이 의아한 표정으로 다가왔으나, 훈은 대답 없이 서책방 입구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손에 들고 있던 <북학의>는 제자리에 꽂아두지도 못한 채 무의식적으로 꽉 쥐고 있었다.
훈은 가게를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여인은 이미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린 후였다.
창가에 앉은 그녀의 옆모습은 고요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세상의 소음 따위는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 그녀는 다시 활자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훈은 서책방을 빠져나왔다.
운종가의 소음이 다시 귓가를 때렸다. 하지만 훈의 머릿속은 방금 본 여인의 잔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전하, 책은 사시려는 겁니까?"
태석이 훈의 손에 들린 책을 가리켰다. 훈은 그제야 자신이 책을 들고 나왔음을 깨달았다.
"......그래. 값을 치르고 오거라."
훈은 책을 태석에게 건넸다. 태석이 서책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동안, 훈은 제자리를 맴돌았다. 귓불이 여전히 뜨거웠다. 도망치듯 빠져나온 자신이 한심스러우면서도, 가슴 한구석에서는 알 수 없는 고동이 멈추지 않았다.
잠시 후, 태석이 책을 품에 안고 돌아왔다. 그는 주군을 힐끔거리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전하, 혹 아시는 분이십니까?"
"아니다. 모르는 여인이다."
"헌데 어찌 그리 혼비백산하셨습니까. 마치 호랑이라도 마주친 분 같았습니다."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눈빛이었다. ...시끄럽다. 가자."
훈은 짐짓 태석을 타박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태석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수천의 군사 앞에서도, 깐깐한 대신들의 독설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 않던 그였다. 그런데 고작 책 읽는 여인의 눈빛 하나에 말문이 막히고 도망쳐 나오다니.
'그 책을... 정말 이해하고 읽는 것일까.'
양반가 규수들이 겉치레로 서책을 끼고 다니는 것은 종종 보아온 일이다. 허나 그녀의 눈빛은 달랐다. 활자 너머의 세상을 꿰뚫어 보려는 듯한 집요함. 그리고 그 속에 서린 알 수 없는 갈증. 그것은 훈 자신이 조정에서 느끼던 답답함과 닮아 있었다.
어느새 훈과 태석은 돈화문 옆 쪽문에 다다랐다.
태석이 주변을 살피고 신호를 보냈다. 훈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문 안으로 들어섰다.
끼익, 쿵.
육중한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바깥세상의 소음이 단절되었다.
순간, 훈의 어깨 위로 보이지 않는 무게가 내려앉았다. 궐 안의 공기는 무겁고 정적이었다. 흙냄새 대신 향 냄새가, 활기 대신 엄격한 규율이 그를 맞이했다.
"전하! 무사히 오셨습니까!"
기다리고 있던 상선 김 내관이 울먹이며 달려왔다. 훈은 그 호들갑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쓰고 있던 갓을 벗어 넘겼다.
"별일 없었다. 좌의정 영감이 없는 조정은 조용하더냐?"
"예. 전하께서 심기가 불편하시어 아무도 들라 하지 않으신다 하니, 다들 숨소리도 못 내고 몸을 사리고 있습니다. 다행히 별다른 보고는 없었사옵니다."
"그래, 늙은 여우들이 눈치 하나는 빠르지."
훈은 피식 웃으며 김 상선이 건네는 곤룡포를 받아들었다. 익선관을 머리에 쓰자, 관자놀이를 조여오는 익숙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잠시나마 '선비 이훈'으로 거닐었던 시간은 꿈처럼 흩어지고, 다시 '조선의 왕'이 남았다.
하지만 단 하나, 꿈이 아니라는 증거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북학의>.
훈은 내관들을 모두 물리고, 서안 앞에 앉아 책을 펼쳤다.
종이 냄새가 났다. 궐 밖 서책방의 묵은 먼지 냄새, 그리고 어렴풋이 느껴지는 은은한 난초 향기.
훈은 책장을 천천히 넘겼다. 아까 그녀가 읽고 있던 페이지를 찾았다.
재물을 우물에 비유하여 소비를 권장하는 대목.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다 못해 위험하기까지 한 사상이 담긴 문장이었다.
훈의 손가락이 활자 위를 더듬었다.
그녀는 이 문장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녀도 나처럼 이 좁은 조선이 답답했을까. 아니면, 닫힌 문을 열고 새로운 바람을 맞고 싶었을까.
"이름이라도... 물어볼 것을 그랬구나."
훈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빛은 단단했으나, 그 이면에는 깊은 고독이 배어 있었다. 마치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세상에서, 오직 책 속의 저자하고만 대화를 나누는 사람처럼.
훈은 붓을 들었다.
'아니지.'
그는 붓을 거두었다. 귀한 서책의 여백을 함부로 더럽히는 것은 학자의 도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이 책에 직접 적어버리면, 이 생각은 오직 이 책 안에만 갇히게 된다.
훈은 책상 한쪽에 놓인 화선지 조각을 끌어왔다. 책갈피로 쓰기 딱 좋은 크기였다.
그는 먹을 찍어 자신이 평소 생각했던 바를 정갈하게 적어 내려갔다.
'우물의 물은 퍼내지 않으면 썩는 법이나, 두레박이 없으면 퍼낼 수조차 없다. 그대는 두레박을 어디서 구하려 하는가.'
훈은 붓을 내려놓고, 먹이 마르기를 기다려 그 쪽지를 책갈피 사이에 끼워 넣었다.
전해질 리 없는 독백이었다. 다시 그 서책방에 갈 수 있을지, 간다 해도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은 없었다.
하지만 훈은 책을 덮으며 묘한 기대감을 느꼈다.
답답하기만 했던 궐 안의 하루가, 내일을 기다리는 설렘으로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았다.
훈은 창문을 열었다.
밤바람이 불어왔다. 멀리 운종가 쪽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오는 듯했다.
그 소음 속에, 옥색 치마를 입은 여인이 여전히 책을 읽고 있을 것만 같았다.
"문우사..."
훈은 서책방의 이름을 입안에서 굴려보았다.
어쩌면 오늘, 그는 난생처음으로 마음이 통하는 인연을 스쳐 지나간 것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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