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숨 쉴 구멍
궁궐 내 분위기는 무거웠다. 여름의 초입이라 하기에는 이른 시기였으나, 이훈의 등줄기에는 이미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왕의 옥좌 앞에는 조정의 대신들이 붉고 푸른 관복을 입고 도열해 있었다. 그 맨 앞줄, 가장 위압적인 자태로 서 있는 이는 좌의정 민암이었다.
"전하, 하오나 그것은 오랑캐의 법도이옵니다."
민암의 목소리는 낮고 정중했으나, 그 안에 담긴 뜻은 단단한 벽과 같았다.
"오랑캐의 법도라니. 좌의정은 말을 가려서 하시오."
훈이 짐짓 엄한 표정으로 붓을 내려놓았다.
"박제가가 올린 상소에는 청나라의 수레와 벽돌을 도입하여 민생을 이롭게 하자는 내용이 담겨 있소. 백성이 가뭄에 허덕이고 물자 유통이 막혀 굶어 죽는 판국에, 그것이 오랑캐의 것인지 아닌지가 무엇이 그리 중요하단 말이오."
훈의 논리는 명확했다. 그는 즉위 이래 줄곧 실학을 장려하고 백성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려 애써왔다. 그러나 민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흰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마치 철없는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입을 열었다.
"전하,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은 알겠으나, 근본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법입니다. 청나라는 명나라를 무너뜨린 원수이자, 예법을 모르는 오랑캐들입니다. 그들의 문물을 무분별하게 들여오는 것은 사대부의 기개를 꺾고 성리학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질서가 밥을 먹여주지는 않소."
"질서가 무너지면 밥을 먹을 입조차 사라지게 됩니다. 전하께서는 부디 당장의 이익보다 세상의 이치를 생각하시옵소서."
민암의 뒤를 이어 예조판서와 사헌부 관리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이며 합창했다.
"전하, 좌의정 대감의 말씀이 지당하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실리를 생각하는 건 오직 자신뿐이라 느꼈다. 민암과 그를 따르는 신하들은 '도리'라는 명분을 방패 삼아 왕의 개혁을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답답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그대들이 말하는 도리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지 않느냐고, 굶어 죽는 아이 앞에서 주자학을 논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느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훈은 입술을 깨물었다.
흥분해서는 안 된다. 감정을 드러내어 말문이 막히거나 더듬거리기라도 한다면, 저 노회한 대신들은 그것을 왕의 유약함으로 포장해 공격할 것이다.
훈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차갑고 건조한 미소였다.
"과연... 대감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소."
편전 안에 묘한 안도감이 감돌았다. 민암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근본을 지키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니, 이번 수레 도입 건은 다시 논의하도록 하겠소. 오늘은 이만 파하겠소."
훈은 도망치듯 자리를 파하고 일어났다.
뒤통수에 꽂히는 대신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그것은 존경이 아니었다. 아직 덜 여문 왕을 자신들의 뜻대로 꺾어놓았다는 오만한 만족감이었다.
***
대전으로 돌아온 훈은 관복을 벗어 던지듯 내관에게 넘겼다. 익선관에 눌려 있던 이마가 지끈거렸다.
"전하, 옥체가 상하십니다. 고정하시옵소서."
상선 김 내관이 안절부절못하며 따뜻한 차를 올렸다. 훈은 찻잔을 받아 들었으나 마시지 않고 탁자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찻물이 튀어 탁자를 적셨다.
"고정? 내가 지금 고정하게 생겼느냐."
훈은 탁자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성군. 세상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불렀다. 백성을 사랑하고 학문을 즐기는 어진 임금. 하지만 실상은 허울 좋은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좌의정 민암은 강했다. 그의 아들 민기준이 청나라 사신으로 떠나 있는 동안 조정에서의 입지가 줄어들 줄 알았으나, 오산이었다. 민암은 아들의 출세를 등에 업고 오히려 기존 집권 세력을 결집해 왕을 압박하고 있었다.
"숨이... 막히는구나."
훈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궐의 높은 담장이, 붉은 기둥이, 화려한 단청이 모두 자신을 옥죄는 감옥창살처럼 느껴졌다.
그때였다.
대전 밖에서 나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중전마마 드시옵니다."
훈이 표정을 수습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중전 조씨였다. 그녀는 의례적인 절차도 생략하고, 직접 다과상을 들고 성큼성큼 들어왔다.
"또 인상을 쓰고 계십니다. 미간에 주름이 깊어지면 위엄이 아니라 고집만 있어 보입니다."
"중전인가. 기척도 없이."
"기척을 내면 '나는 괜찮다, 혼자 있고 싶다' 하며 문전박대하실 것 아닙니까. 숙의 박씨가 문밖에서 전하를 뵙기를 청하고 있던데, 그냥 돌려보냈습니다."
조씨는 덤덤하게 훈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훈은 픽 웃음이 나왔다. 이 답답한 구중궁궐에서 유일하게 격식 없이 대할 수 있는 사람. 아내라기보다는 오랜 정치적 동지이자 벗.
"잘했소. 오늘은 누구의 비위도 맞추고 싶지 않구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좌의정 영감 때문이지요?"
조씨가 찻주전자를 기울여 훈의 잔을 채워주었다. 향긋한 국화차 냄새가 났으나 훈의 속은 여전히 쓰렸다.
"그 늙은이의 고집은 쇠심줄보다 질기오. 명분론만 내세우니 대화가 통하질 않아."
"영감은 평생을 그리 살아온 사람입니다. 전하께서 아무리 논리로 이기려 해도, 그들은 귀를 닫고 있을 겁니다."
"알고 있소. 헌데 화가 나는 건... 그들의 궤변에 반박하지 못하고 '옳다'고 해버린 나 자신이오. 왕이 되어가지고 신하의 기세에 눌려..."
훈이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중전 조씨는 그런 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안다. 훈이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하는지. 남들 앞에서는 성군의 가면을 쓰고 있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불안해하고 외로워하는지.
그녀의 손이 훈의 손등 위로 다가가려다 멈칫했다. 대신 찻잔을 쥐어 훈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전하."
"말해보시오."
"전하께서는 기계가 아닙니다. 억지로 참는다고 능사가 아닙니다. 이러다가는 화병으로 먼저 쓰러지십니다."
"그럼 어찌한단 말인가. 상을 엎고 고함이라도 치리?"
"아니요. 도망치시라는 말입니다. 잠시라도."
"도망?"
훈이 의아한 눈으로 중전을 쳐다보았다. 조씨는 빙그레 웃었다.
"숨 쉴 구멍을 찾으십시오. 궐 안의 공기가 탁하여 숨을 쉴 수가 없다면, 밖으로 나가 깨끗한 공기라도 마시고 오셔야지요."
"잠행을 나가라는 소리군."
"예. 마침 내일 좌의정 영감이 북한산에 있는 별장으로 요양을 떠난다고 합니다."
"요양이라니?"
훈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중전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담담하게 답했다.
"요양을 핑계로 한 시위지요. 며칠 전 전하께서 이조판서 인사에 영감의 뜻을 따르지 않으셨잖습니까. 늙은 몸이 아파 조정에 나갈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는 겁니다."
"허, 그 늙은이의 고집이란. 나라 일보다 제 자존심 세우는 것이 먼저라니."
훈은 혀를 찼으나 표정은 한결 가벼워 보였다.
"덕분에 기회가 생기지 않았습니까. 호랑이가 굴을 비웠으니, 그 밑의 여우들도 내일은 입궐하지 않고 영감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쁠 겁니다. 조정이 텅 비는 날이지요."
"그렇군. 내가 자리를 비워도 찾을 이가 없겠어."
"도승지에게는 제가 잘 둘러대겠습니다."
훈의 눈빛이 흔들렸다. 궐 밖. 높은 담장 너머의 세상.
좌의정이 별장으로 떠난다면, 수많은 신하들의 시선들이 느슨해진 틈을 타 숨통을 틔울 수 있을 것이다.
"위험하다. 호위도 마땅치 않고..."
"태석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전하, 솔직히 말씀드리면..."
조씨가 훈의 얼굴을 빤히 뜯어보았다.
"용포를 벗고 갓을 쓰시면, 영락없는 샌님으로 보이실 겁니다. 아무도 전하를 왕이라 생각지 않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그거 칭찬인가?"
"물론이지요. 백성들 틈에 섞여도 위화감이 없을 만큼 선해 보이신다는 뜻입니다."
훈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꽉 막혀 있던 가슴 한구석이 아주 조금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자네는... 정말 못 당하겠군."
"그러니 다녀오십시오. 가서 백성들이 무얼 먹고 사는지, 진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에 담고 오십시오. 그래야 저 늙은 여우들을 상대할 힘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조씨는 찻잔을 들어 훈에게 권했다. 훈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한 기운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그래. 내일은... 나가보자."
훈의 결정에 조씨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비해 두겠습니다. 옷은 상선을 통해 침전에 넣어둘 테니, 편안히 주무십시오."
조씨가 문을 닫고 나갔다.
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밤하늘에 별이 총총했고, 담장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뺨을 스쳤다.
내일은 왕이 아닌, 사내 이훈이 되어 거리를 걸을 것이다.
***
다음 날 새벽,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올 무렵, 훈은 평복으로 갈아입었다. 익선관 대신 갓을 쓰고, 곤룡포 대신 옥색 도포를 걸쳤다.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은 중전의 말대로 제법 그럴싸한 양반집 자제 같았다. 수염을 단정하게 다듬고 나니, 영민해 보이지만 어딘가 세상 물정 모르는 유생의 태가 났다.
"전하, 부디 옥체 보존하시옵소서. 해가 지기 전에는 꼭 환궁하셔야 합니다."
상선 김 내관이 울상을 지으며 신신당부했다. 그는 왕이 홀로 궐 밖을 나서는 것이 못내 불안한 눈치였다.
"걱정 마라. 내 발로 걸어서 나가는 것이니, 내 발로 걸어서 돌아올 것이다. 태석아, 가자."
훈은 호위무사 태석만을 대동하고 대전 뒤편의 비밀 통로를 통해 돈화문 쪽문으로 향했다. 그림자처럼 따르는 태석 역시 평복 차림에 검을 천으로 감싸 봇짐처럼 멘 상태였다.
쪽문의 빗장을 열자,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바깥세상이 열렸다.
새벽 공기는 차가웠으나 상쾌했다.
궐 안의 공기가 정제되고 고요했다면, 밖의 공기는 거칠고 생동감이 넘쳤다. 멀리서 닭 울음소리가 들리고, 밥 짓는 연기 냄새가 났다. 훈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흙냄새가 반가웠다. 이것이 그가 그토록 원하던, 숨 쉴 구멍이었다.
"가자."
훈은 태석을 뒤로하고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한양의 중심, 운종가는 이른 아침부터 활기가 넘쳤다. 좌판을 벌이는 상인들의 고함, 흥정하는 아낙네들, 지게를 지고 바삐 움직이는 꾼들. 그 소란스러움이 훈에게는 음악처럼 들렸다. 그는 뒷짐을 지고 천천히 인파 속을 걸었다.
사람들은 그를 힐끔 쳐다보았으나, 그저 '한양의 한가한 선비' 정도로 여기고 무심히 지나쳤다. 누구도 그에게 엎드리지 않았고, 누구도 그에게 나라의 근본을 따져 묻지 않았다. 완벽한 익명성, 그것은 권력의 정점에 선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역설적인 해방감이었다.
훈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서책방들이 모여 있는 거리로 향했다.
그는 정치적인 문제로 머리가 아플 때마다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리곤 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궐 안 서고에 없는, 백성들이 읽는 진짜 책들이 궁금했다. 제법 규모가 큰 서책방 앞에 훈이 멈춰 섰다.
'문우사? 이런 곳도 있군.'
안에서는 묵향과 종이 냄새가 은은하게 배어 나왔다.
훈은 태석에게 눈짓을 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운명을 바꿀 만남이 기다리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조회수 13·좋아요 1·1/2/2026